‣ 감북동(甘北洞)
감천리(甘泉里)가 일제에 합병된 후 감북, 감일, 감이로 분리되면서 관할하는 행정동명과 병행하여 호칭된다. 감북은 감천이 있는 북쪽에 위치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지금도 그 단우물이 있다. 가무나리, 갈미, 배다리의 세 자연마을이 있다.
‣ 감천(甘泉, 가무나리)
단샘이 있는 들이란 뜻이다. 이곳의 샘물 맛이 다른 곳보다 단맛이 있다고 해서 이곳을 "가무나리"라 불렀고 한자로는 甘泉이라 한다. 나리는 내(川), 천(泉)의 옛말로서 단샘이라는 뜻이다.
‣ 갈미
감천마을의 아래 끝쪽에 위치하였다고 해서 감미(甘尾)라 하였는데 이 말이 변해서 "갈미"가 되었다고 한다.
‣ 배다리(船橋里)
배달(培達)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밝달-밝다-배달>에서 유래된다. 배달은 신성시 되던 곳의 지명에 많이 붙여지던 말이다. 이곳의 건너가 솟대백이이며 그 뒷 마을이 가무나리 또 주위에 신우실 등 이 일 대는 옛날 제천 행사의 장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일설에는 옛날에 이곳에 큰 장마가 져서 다리는 떠내려가고 할 수 없이 배를 연결하여 다리를 놓아 건너다녔다고 해서 "배다리"라고 하고 한자로는 "船橋里"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하나 그럴만한 지형을 갖추고 있지 않으며 침수시에도 다리를 놓아야 할 정도로 심각한 곳이 못되어 배다리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잘못알려진 것으로 보인다.
*고창들 - 가무나리에 있는 들
*멍아배미 - 감북리에 있는 논
*보습배미 - 감북리에 있는 보습처럼 생긴 논
*선단배미 - 감북리에 있는 논
*안촌(安村) - 가무나리 윗마을로 광주 안씨 집성촌이라 붙여진 이름
*행길가 - 서부면사무소 및 서부파출소, 서부초등학교, 서부우체국이 위치한 면소재지 마을이다.
*새마을 - 감북동 동사무소 윗마을로 1950년 6.25전쟁으로 한국군 및 UN군이 북진할 때 연천, 철원, 금화지역 주민을 이곳으로 피난시켜 정착한 마을로 큰 부락이 형성되었다.
*원호주택 - 1960년대 원호자금으로 조성한 마을.
*행계막 - 배다리 윗동네를 행계막이라 한다.
*움터굴 - 원호주택 위쪽을 가리킨다.
*언덕재 고개 - 감북동 뒤 일자산 가무나리에서 서울 둔촌동 약수터로 넘어가는 고갯길을 말한다.
*새우개 고개 - 오금동-둔촌동 약수터로 가는 고개로 현재는 10차선 국도가 뚫려있다.
‣ 감일동(甘一洞)
감일동과 감이동의 법정동은 감천리에서 분리된 이름이다. 시리미, 신우실, 솟대백이(효죽동), 벌말, 새말, 능안, 안산, 새마을(成志村), 정림 등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 시리미(詩林)
시리미의 원어는 시루뫼(甑山)로서 마을 뒷산이 시루를 엎어놓은 것 같다하여 시루뫼라 하였는데 그후 말이 변하여 시루미가 되었다. 또 그곳에 벼슬한 선비(능성 구씨)가 살면서 언제나 글 읽는 소리와 풍류를 즐기던 선비들 시 읊는 소리가 그치지 않아 시림(時林)이라 부른다고도 한다
‣ 솟대백이(일명 효죽동)
솟대백이는 말의 뜻이 많이 변한 지명이다. 그곳에는 예로부터 능성 구씨가 과거에 급제하여 솟대를 세웠다 하며 하늘에 제사를 지네고 또 마을의 액을 막았었던 곳이기도 하며 높은 벼슬을 한 분이 살던 곳이라고도 한다. 그러다가 1910~1920년사이 일제가 전국을 일제히 지적 측량하면서 솟대백이를 한자로 쓰다 보니 효도효(孝)자와 대죽(竹)을 써서 효죽동이란 신조어를 만들어낸 것이다. 1980년대까지도 순수한 우리말 솟대백이었다.
‣ 능안(陵內)
감일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이며 동리 앞산이 풍수지리로 볼때 명당이 있어 옛 백제 때 능이 있었다는 전설이 전하며 그 후 그 근처자리에 능성구씨 묘를 써 전하여 오며 그 안쪽에 생긴 부락을 능안이라 한다.
‣ 우렝이짝(재궁(梓宮), 능넘어)
산 모양이 우렝이같이 생겼다하여 "우렝이짝"이라 한다하나 그러면 그 근처를 재궁이니 능넘어니 부를 까닭이 없다. "남한비사"에서는 고려 때의 문인 이규보의 시를 근거로 백제때의 우능(愚陵)이 있던쪽이라 하여 [우능쪽-우렝이짝]으로 어원이 변하였다고 추정하고 있다. 또한 [웃가챙이], [아랫가챙이]란 지명에 주목하여 왕능을 모실 때의 가청(假廳)을 설치했던 곳이라 보고 있다.
‣ 새말
현 판교구리 고속도로 서하남 IC옆 마을로서 동서울골프장 입구 마을이다. 안산-새말 아랫마을로 배다리 건너쪽 안산밑 부락을 안산이라 한다.
‣ 새마을(成志村)
1970년대에 형성된 마을로 집 없는 사람들이 뜻을 모아 이룩한 마을이라 하여 성지마을이라 하며 현 감일3통으로 되어있다.
낭떠러지 - 효죽동 앞들건너 산밑
퉁텡이 - 효죽동과 능안 중간에 있는 하천 건널목
석밭텡이(石田湯) - 능안마을 위쪽으로 굳이 한자로 쓰다보니 石田湯이라 쓰나 고유지명은 석밭텡이 이다.
들구리 - 현 감일3통 지역으로 옛날에는 고래 논이 있어 벼농사가 잘 되던곳이었는데 1970년대에 주택이 들어섰다.
도투마리고개 - 감일3통과 서울 마천동 사이 산등성이로 도투마리 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서돌고개 - 감일동 시림에서 능안으로 넘어가는 중간에 있는 고개(현 상수도 관로상으로 판교-구리간 고속도로가 지나간 지점을 말한다.)
새말고개 - 능안에서 새말로 넘어가는 고개길(현 서하남 IC)
다리목새 - 시리미에서 서울시 오금동으로 가는 경계지점에 개천 건널목을 말한다.
한국전력초고압변전소 - 1970년대 건설된 초고압 변전소가 있다.
‣ 신우실(信友室) - 이곳에는 옛적에 집이 몇 채 밖에 없어 이 마을에 사는 노인들이 적적하여 믿을 만한 친구를 찾아 사귀었다고 해서 한자로 "信友室"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혹은 새 친구를 찾아 사귀었다고 해서 신우실이라 쓰기도 한다.
‣ 감이동(甘二洞)
감천리에서 분리된 마을이다.
‣ 정림(井林 또는 靜林)
이 마을에 물맛이 좋고 물이 잘 나오는 샘물이 있어 샘말이라고 한다. 예로부터 감천동 전체를 井林 또는 靜林이라 불리우고 있다.
‣ 참새골(冷泉谷)
남한산 하단에 있는 정림 골짜기에 바위 밑 틈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약수라 하여 인근 주민들이 애용하는 약수터이다. 원 이름은 찬샘골(冷泉谷)이었는데 말이 변하여 참새골로 불리우고 있다.
‣ 정림골
정림앞들을 정림골이라 하며 비교적 넓은 평야지로 형성되었고 농사도 잘되며 생활이 넉넉한 사람이 많다.
‣ 벌말
정림앞 벌판마을로 500여년 된 느티나무가 있고 그 마을에는 전통무속인 김씨 문중이 살고 있다.
‣ 널무늬(板門里)
이 마을은 널판지로 대문을 단집이 많았다 하여 널문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말을 한자로 써서 "板門里"가 된 것이다.
‣ 광암동(廣岩洞)
동리의 중앙에 큰바위가 하나 있는데(원위치는 현 광암동 정수장) 이 바위는 선사시대 고인돌로서 그 형상이 개구리 같다고 하여 개구리 바위라고도 부르며 이 바위가 크고 넓어 "넓은바위(廣岩)"라 불리었고 이 고장의 지명이 광암동으로 되었다. 이 바위는 서울시가 광암동 정수장을 1977년 건설하면서 방치하였다가 1996년 하남시에서 너분바위 입구(판교-구리 고속도로변)에 옮겨 놓았다
‣ 광암동 정수장
고골과 광암동을 연결하는 향교 고개하단에 서울시민의 상수도를 공급하는 수원지가 1978년 준공되었다.
‣ 너분바위
광암리 199번지에 있던 선사시대 고인돌로써 개구리처럼 생겨 개구리 바위라고도 부르며 이 바위가 크고 넓어 넓은 바위(廣岩)라고 불러 왔으며 여기에서 유래된 명칭이다.
‣ 산밑에
이성산의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고 하여 산밑이라고 부른다
‣ 남밖(남외)
이성산의 성밖에 있는 부락이라 하여 남밖이라고 칭하게 되었으며 남외(南外)라고도 한다. 이곳에서 2500년전 고인돌 4기가 발견(1977년 당시 서부면장 구자관이 최초 발견 보고함)되어 그후 1999년도에 세종대학에 의해 정밀발굴 되었으나 광암동정수장-상일동간 도로확장 공사로 인하여 부득이 이전하게 되어 현재 고인돌은 하남시청 광장에 이전 복원 보존되어 있다. 남밖에는 방위상 주산(主山)(이성산)의 남쪽 밖에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이성산의 대치어로 객산(客山)과 마주하고 있다
‣ 초일동(草一洞)
조선시대에는 초덕리(草德里)였다.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1917)할 때 고친 이름이다. 1928년에 이곳에 면사무소가 설치되었으며, 상화울과 청뜰의 자연마을이 있다.
‣ 상화울(桑花谷)
옛날에는 이곳에 뽕나무 밭이 유난히 많아 뽕나무 촌이라 불렀는데 그 후에 상화곡이라 불리다가 말이 변하여 상화울이 되었다. 상화울에는 연안이씨(延安李氏)의 집성촌이 형성되어 있다.
‣ 청뜰
이 마을 앞에는 큰 연못이 있고 그 주위에는 나무숲이 많이 우거져 "푸른 뜰"이란 뜻으로 청뜰이라 부르게 되었다.
항공부대 - 상화울 옆에 항공부대가 있다.
웃말, 샘말 - 마을 윗쪽을 말하며 샘이 나는 우물이 있다.
그 밖에 너멍굴, 우죽곡, 밤동산, 방죽곡, 사리곡, 덕죽곡이 있다.
‣ 초이동(草二洞)
법정동인 초일동까지 관장하는 행정동명과 병칭된다. 조선시대에는 이 일대가 초덕리(草德里)였던 것을 일제가 들어와 1914년대 지적 정리를 하면서 초일, 초이로 갈라놓은 것이다. 사래기, 송림, 지지미(지잠리), 대사골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었다.
‣ 사래기
사래란 농경지의 길이를 표시하는 말로 기다란 형태의 농경지 즉 깊은 골의 농경지를 일러 사래 긴 밭, 사래 긴 논이라 하였다. 이곳의 농경지가 깊고 길어서 생긴 이름이다.
‣ 송림
이 마을 입구에는 옛부터 노송들이 우거져 있는데, 이러한 연유로 인하여 이 마을을 "松林"또는 "소나무 촌"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 지지미(芝芝美)
지지미 또는 지잠리(芝岑里) 지(池)씨가 대대로 많이 살아온 마을이라 <지집-지짐>이라 부르게 된것이다. 1910년 한일 합방이 된 후 최초의 면소재지였던 마을이다. 일설에는 마을 앞에는 앞산이라고 불리는 기자산이 위치하고 있는데 기자산 자락 맨 아래 평지에 자리 잡은 마을 주변은 묘지쓰기에 적합한 지세를 형성하고 있어 옛 부터 각 씨족 묘지가 마을을 중심으로 들어찬 관계로 묘역의 잔디로 인해 마을 전체가 잔디속에 파묻혀 있으므로 그 아름다움이 지지미(芝芝美)로 표현되어 불리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한일합병 이후 면사무소 설치령에 따라 당시 광주군 서부면 초대 면장을 역임한 강대규씨가 마을 이름을 지으면서 지지미를 지지리로 불러보니 어색하여 연구 끝에 잔리를 "草"로 바꾸고 두자로 겹쳐지는 芝를 "二"로 고쳐 초이리고 한것이며 1989년 1월에 초이동으로 되었다. 당시 면사무소가 처음으로 건립된 곳은 지금의 초이동 280번지라 한다.
‣ 대사골(大蛇谷)
배미가 큰 논이 많다하여 큰 배미골로 불리었는데 한자화 하는 과정에서 와전되어 뱀이란 뜻의 대사골이 되었다. 또 다른 설에는 1927년 진주강씨 문중에서 발행한 공목공파보(恭穆公波譜)에는 大寺谷으로 표기되어 있다 하여 큰 절터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대사곡에는 용의 자리라고 불렷던 우물터가 있었고 샘도 비교적 넉넉하게 나왔는데 몇 해 전 이 우물이 흙으로 메워져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 월남촌 또는 삼화촌(三和村)
1968년에 생긴 부락으로 한국군이 월남전에 참전한 시기에 조성되었다 하여 월남촌이라 하였으나 잡다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부락이라 다툼도 많아 당시 그 땅의 소유주였던 오정근씨가 화합하여야 한다는 뜻으로 삼화촌이라 명명하고 현판을 내걸었다.
‣ 도시장제 또는 개뎅이
서울강동구 상일동과 접한 지역으로 일제시대 때 가축을 잡던 도살장(현 농협 초이동 지소자리)이 있던 곳이다. 도시장제 또는 개뎅이라 부른다. 이곳은 1970년대에 새로 형성된 마을이다
‣ 여산골 - 현 동일가구 앞 동리를 말한다.
‣ 학암동(鶴岩洞)
법정동명이다. 학바위, 학바위골, 학암동. 남한산성 서문 밖 자락에 위치한 마을로서 바위가 많은데 그 바위들이 학처럼 생긴 바위가 있으므로 두룸바위(두루미, 학 등을 닮은 바위)라 붙여진 이름이다.
‣ 돌무데기 - 학암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며 돌무더기가 많음. 지금은 군용지로 편입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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