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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공간/고향하남

동부지역의 지명유래(문화원)

by 자연은내친구 2022. 3. 1.

‣ 상산곡동(上山谷洞)
검단산을 중심으로 옛부터 우마(牛馬)가 다니지 못하는 높은 산과 계곡이 많고 물이 흐르는 상류계곡에 위치했다고 하여 상산곡이라 칭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이 동부면 산곡리였는데 일제시대에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산곡리의 大姓이며 조선시대의 명문가인 기계 유씨의 세력을 분리하기 위해서 이곳을 중부면에 귀속시키고 윗쪽의 산곡이라 하여 상산곡이라 하였다. 이 마을은 가지울, 거문다리, 굽들이, 동수막, 섬마을, 어둔이골, 하다리골로 형성되어 있다


‣ 어진마을
병자호란 때 호종(護從)군사들이 주둔하던 곳으로 어둔(御屯)골이란 뜻이다. 이곳은 병자호란 당시 원군들이 검단산에 진을 치고 있을 때의 격전지로 알려지고 있는데 어둔이골이 어원변화로 인하여 어진이골로 불리워 진 것 같다.
다른 뜻으로 전해져 오는 것도 있다. 어진 마을은 다른 마을보다 유난히 일찍 해가 지기 때문에 어둡다 또는 어두워진다 해서 어진마을이라 전해져 내려온다고도 한다.

어진마을의 산이름 - 간유봉, 두리봉

어진마을의 계곡이름 - 숯가마골, 장구맥이(장구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 말구리(두리봉 넘어 계곡, 계곡 중턱에 곤도바위가 있다)

어진마을의 들이름 - 건고래(은고개 오르면서 좌측), 어밀량(두리봉 밑 언덕배기), 차돌백이(은고개 밑 한천 약수터 아래 있는 논과 밭 -차돌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라 함)


‣ 은고개
하남시와 광주군의 경계를 이루는 고새로 지명유래에 대한 여러가지 설이 있는 곳이다.

1) 은근하게 내지는 은은하게 올라가 넘어가는 고개라 하여 은고개라 불리어졌다 한다.

2) 한양에 살던 엄승승이 묘자리를 구하러 다니다 고개가 하도 험하여 마루턱에서 쉬면서 자기의 성을 따 엄고개라 하였던 것이 은고개로 변한 것이라고 전한다.

3) 권택(1569~1612)은 조선시대의 문인으로 자는 예장, 호는 석주이며 송강 정철등과 교유하며 벼승의 뜻을 버리고 시문학으로 소일하였는데, 광해군 때 귀양을 가다 지금의 은고개에 당도하여 산수가 빼어나고 한강을 굽어보는 산세와 우거진 숲, 새들의 노래, 고요한 그늘아래 앉아서 그 시대를 한탄하며 그가 사모하는 은대감을 생각하며 시를 남겼다고 하여 은고개라 불렀다고 한다.

4) 산세가 매(鷹)의 형상이라 하여 응(鷹)고개 였던것이 은고개로 변하였다고 하는데 이지역의 묘비에도 그렇게 표기된 곳이 있으며 엄고개로 표기된 곳도 있다.


‣ 건고래
은고개를 올라가다 보면 왼쪽에 논밭이 있다. 이 논밭은 하늘만 쳐다보고 농사짓던 논이었다. 지금은 객토가 이루어져 창고가 들어서 있으나, 한동안 쓰레기 매립으로 오염된 침출수가 흘러나와 문제가 되었던 곳이다.

 
‣ 한천(寒泉)약수터
지금은 은고개 약수터로 유명해져 있지만 이 약수터의 명칭은 한천약수터이다. 옛날에는 은고개를 오르내리던 사람들이 갈증을 해소하고 엽전이나 1전짜리 동전을 놓고 가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 검은다리
일명 거문다리라고도 하며 현교(玄橋)라고도 한다. 이 마을을 부를 때 지금까지도 거문다리라고 하지만 옛날에는 현동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예로 거문다리에서 위로 올라가면 마을안 작은 다리의 이름을 보면 현동교라 쓰여 있어 이곳이 현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검단산의 깃대봉, 고추봉 그늘에 가리어 늘 늦게 밝아지므로 어두운 동네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볼 수 있고, 옛날에 다리를 놓았을 때는 시멘트가 없는 관계로 통나무로 다리를 만들어 사용했는데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통나무 다리 색깔이 검은 색으로 변한 것을 보고 마을 사람들은 검은 다리라 했다는 말도 전해진다.

산이름 - 검단산 형제봉, 깃대봉
계곡이름 - 큰골, 바른골, 웅골, 뒷골, 직골
들이름 - 댁진마루, 등밑


‣ 굽들이
앞들의 내가 굽이쳐 휘돌아가서 굽이치는 냇가의 들이라 하여 굽들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또한 앞의 흐르는 내가 휘돌아가서 들판의 모양이 말굽처럼 생겼다 하여 굽들이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산이름 및 계곡이름 - 정골, 화장골, 흙텅골, 고추봉, 산수안(유진오 박사 묘)
들이름 - 함수개( 어둔이골, 거문다리, 섬말에서 내려오는 물이 합쳐지는 곳)


‣ 섬말
섬말을 들어서면 작은 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커다란 부추밭이 있다. 이 밭이 옛날에는 논이었다고 하는데 특이한 것은 양어장처럼 항상 물이 차 있었고 논 가운데 작은 섬 같이 봉우리가 있어 사람들은 섬논(섬배미)이라 했다. 섬이 있는 마을을 일컬어 섬마을, 다시 말해 섬말이라 불려졌다고 한다. 또는 이 마을 주위로 남한강의 지류인 산곡천이 흐르는데 이 물줄기가 마을 주위로 흐르고 있어 마을의 형태가 마치 섬과 같이 되어있다고 해서 섬마을이라고 칭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 가지울
1) 옛날에 가재가 많아 가재잡던곳.
2) 또 다른 설에는 이 마을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나무들이 가지(枝)를 많이 뻗었다고 해서 처음에는 가지골이라 하였으나 그 말이 변하여 가지울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3) 이 마을 근처의 골짜기가 마치 나무가지 처럼 낳이 뻗어 있고 그러한 형태의 골짜기를 가진 산이 둘러싸여 있어서 가지동 혹은 가지울로 부른다고도 한다
산이름- 벌봉, 안산
계곡이름 - 움목골(쇠패말), 절골, 살구나무골(절터), 양지골(지붕바위), 장승백이, 텃골, 사시나무골, 산성, 백작골,  늙은이골


‣ 섬말 애래쪽 중간말 개울건너편
옛날 아주 옛날 지금으로부터 500여년전 어느여인이 애를 업고 다니며 밥을 얻어먹고 간간히 살아왔다. 그런데 그 해는 유난히 흉년인지라 입에 풀칠하기가 어려웠던 해였다. 하루 이틀 배고픔을 참고 또 참고 기다리다 못해 물로 연명한지도 벌써 오래되었다. 배고픔과 굶주림으로 정신이 오락가락 헛것이 보이고 정신이 혼미상태에 바지자 업고 키우던 애가 엄금엉금 기어가니 동물로 착각하고 그만 자기 애를 잡았던 것이다. 혼미상태에서 동수막 친척집에가 솥을빌려다 아이를 끓여먹고 난 후 본인이 먹은것이 아이라는 것을 알고 정신이상이 되어 떠돌다 백작골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설화가 젼해져 오고 있다.


‣ 늙은이골
늙은이골은 노인 한 분이 살고 있던 곳이었다는데, 몇 해의 흉년과 노인이 힘에 부쳐서 농사도 짓지못하고 먹을 것이 없던 터라 배고픔에 노인은 이제 살아야 얼마나 더 살것인가, 문전옥답을 흔죽(쌀만 넣어 만든 죽)과 바꿔 먹기로 했다는 거쇼이다. 흔죽 한 사발에 땅 8평~10평씩 주었다는 것인데 이 노인이 문전옥답을 흔죽으로 다 바꿔 먹은 뒤 굶어 죽었다는 설화거 전해 내려와 그 당시 이곳을 늙은이골이라 했다 한다.


‣ 동수막(東水幕)
길을 가던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막(幕)이 있었던 곳으로 지나가던 사람들이 누구나 쉬었다 갈 수 있고 잠을 잘 수 있도록 이불이며 갖가지 필요한 물건들이 준비되어 있었다고 한다. 동쪽에 물이 흐르는 곳에 위치하였다 하여 동수막이라 불리어졌다. 또 다른 설에는 조선조 선조임금 때까지만 하여도 이곳에 원(院)이 있었는데 그 곁에 동쪽으로 흐르는 물줄기가 있었다고 해서 동수원이라 했으나 임진왜란 이후 원은 폐지되고 대신 그 자리에는 주막이 많이 생겨 마을 이름도 "東水幕"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고속도로가 지나가기 전까지는 이마을은 고시촌으로 유명했다.

산이름 - 고추봉(고추처럼 길고 높다는 데서 이름붙여짐), 자주봉(작은 봉우리들이 자주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
통미산(마을 안쪽에서 마을을 빠져 나갈 때 이 산을 돌아나가게 되어있어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계곡이름 - 아래장구맥이-문배안-약물터-윗장구맥이-깊은골
문배안(산배, 돌배가 많았던 곳)

 
‣ 역과 원의 기능
역(驛)은 말을 키우며 사람이나 말이 숙박할 수 있는 시설이었습니다. 공적인 임무를 띠고 지방에 파견되는 관리나 상인 등 공무 여행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총 545개소의 역이 있었습니다.
원(院)도 역과 마찬가지로 공무 여행자에게 숙식 편의를 제공하던 공공 여관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총 1,310개소의 원이 있었습니다.

원(院)은 역(驛)과 관련을 가지고 설치되었기 때문에 서로 보완적인 관계였습니다.
역은 주요 도로에 30리마다 설치되었고, 원은 역과 역 사이에 설치되었습니다.
역(驛)은 공무 수행중인 관리에게 말을 공급하기도 했으므로
원(院)보다는 공적인 기능이 더 많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역(驛)과는 달리 원(院)은 공공의 임무를 띤 여행자뿐만 아니라 때때로 일반 행인에게도 휴식 및 투숙처로 제공되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시대 우리 하남의 역은 현재 덕풍1동에  덕봉역이 있었으며, 원은 창모로(현재의 창우동) 두미나루와 광주로 가는 길목인 동수원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동수원은 육로를 이용하여 광주방향으로 가는 관리나 상인, 혹인 일반 행인의 휴식처였을 것으로 생각되며, 두미원은 수로를 이용하여 멀리 정선,단양,충주등을 오가는 교통로의 중심위치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입니다.


‣ 벌판말
동수막 아래쪽에 벌판이었던 곳으로 주택들이 들어서면서 벌판마을이 형성되어 부르게 된 지명이라 한다.
아마 현재는 프란체스코의 집이 있는 동리와 그 윗동네를 이르는것 같음.


‣ 마장이
벌판말에 장장교를 건너가면 마쟁이 마을이다. 이곳은 예전 말을 키우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한다.

산이름 - 초당봉(옛날 학자들이 공부하던 초막이 있었다고 전한다. 초당봉에 몇 백년 묵은 참나무가 있었으며 사람들은 이곳 마장과 벌판말, 동수막을 찾으려면 초당봉의 참나무를 보고 위치를 확인하여 마을을 찾았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으며 근래에 들어 초당봉 정상에 철탑을 세워 참나무는 죽어 고목이 되었고 그 여파로 마쟁이 마을에는 젊은 사람들의 교통사고가 자주 일어나며 마을에 불나는 집이 많았다고 하여 동네 주민들이 초당봉에 느티나무를 심었고 산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계곡이름 - 구등박골, 절터골
청량수(청경수) 벌판말과 마쟁이 사이에 흐르는 산곡천 아래 청경수란 큰 웅덩이가 있었다는 것과 마쟁이 밑 냇가(산곡천)를 청량수라 한다.


‣ 하산곡동
하산곡동의 대칭어로 산곡리가 갈라지면서 붙은 이름이다. 이곳은 상산곡이 중부면으로 편입될 때 중부면이 되었다.


‣ 하다리골
옛날에 불을 피워 밝히는 초장봉이 있었는데 이마을만을 유난히 밝히었다 해서 처음에는 "華다리골" 또는 "화달(火月)이골"이라 하였는데 이말이 변하여 하다리골 이라 부르게 되었고, 또 한자로는 賀月 이라고 쓴다.

산곡초등학교가 있는 마을이라 학교앞이라고 더 많이 불려지고 있지만 하다리골은 아래쪽에 다리가 있는 골짜기란 뜻이 된다. 이것은 상산곡 쪽에서 붙인 이름인 것이다.


‣ 점터
산곡초등학교에서 검단산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다보면 지금의 민원마을이 있다. 이곳이 옛날에는 질그릇 옹기등을 만들었던 곳으로서 점터라고 했으나 중부고속도로가 생기면서 집이 철거된 주민들이 이주권을 가지고 이곳에 모여 집을 짓고 사는 곳으로서 현재는 민원마을이라고 부른다.

계곡이름 - 산곡초등학교에서 올라가면서 오른쪽으로 쐐기골, 숯두골, 굴박골, 파래골, 큰골
왼쪽으로 이리빅골, 형제박골, 쇠모리양달골, 양지골, 호통골, 납작골 등이 있다.


‣ 막은데미(마금데미)
하다리골 아래쪽 산동네를 가리켜 부른 것인데 산이 앞을 막은 듯하게 생긴 곳으로 밖에서 보면 큰 산이 앞을 막고 있어 보이지를 않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 말굽바위
막은데미 마을 언덕배기에 있는 바위다. 이 바위에 말굽형태의 자국이 있었다 하여 말굽바위라 부르게 되었는데 지금은 땅에 묻혀 있다 한다.

(위의 말굽바위의 지명유래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말은 주로 무장의 운송수단이어서 그곳의 위치가 군사적으로 상당한 관계항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이 되는 대목이다)

계곡이름 - 선바위골(산곡별장 옆 동쪽), 산곡기도원 옆 양해기(막은데미에서 더 올라가면), 고란(초당봉 뒤 옆), 향교산


‣ 거릿대울
거릿대란 나룻배의 삿대를 뜻하는 거룻대를 말하는 것으로 검단산의 맹수가 자주 내려와 피해를 막기 위해 거릿대 모양의 큰 나무로 울타리를 치고 살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하고 또다른 뜻으로로는 마을 앞길(거리)을 따라 흐르는 냇가(개울)가 있었는데 거리개울-거리때울-거릿대울로 변화한 것으로도 본다.

계곡이름 - 재피골(골짜기를 올라가다보면 앞이 막혀 있는 곳이 있는데 호랑이에게 쫓기다 이곳으로 피신하면 잡아먹히는 골짜기라 해서 재피골로 이름붙여졌다 한다.


‣ 사당골 - 사당이 있는 골짜기라 한다.


‣ 번덕지 - 산중턱인 이곳은 편편한 언덕으로서 지형이 넓은 곳이기도 하다.


‣ 혹구목다리 - 횟가루 공장이 있던 곳으로 횟구목에서 어원이 변하여 혹구목다리라 했다.


‣ 송장바위 - 혹구목 다리밑에 있는 바위


‣ 새능
옛날 조선시대 때 이 곳을 새로이 왕능 자리로 터를 잡아놓았던 자리라고도 한다. 그 때 당시 선조대왕은 다른 곳에 더 좋은 능터를 발견하고서 이 자리는 임진왜란에 공을 세운 기계유씨 충목공파조인 유홍(兪泓)의 묘로 쓸 수 있도록 명을 내려 하사하였다고 한다. 그 후 이 능터를 가리켜 새능이라 불렀다 한다.

계곡이름  도장골 - (지금의 상수도 터널입구. 곡식을 도정하던곳이라 도정골 이라 하던것이 어원이 변하였다 함.
능안 - 송당 유홍의 묘
절아래골 - 능안에서 조금 위쪽
절터골 - 절이 있었다고 함.
중산골 - 절터 앞쪽으로 다음 계곡인데 중이 죽으면 화장을 하던곳이라 “중소”라고도 한다.
큰골 - 골짜기가 넓고 크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안산 계곡(동서울 톨게이트)
배댕이골(바댕이골), 방아골, 접시골

산이름 송이봉(세봉) - 안산(마을 앞쪽의 산). 아름드리 소나무가 많았던 곳으로 옛날에는 송이버섯이 많이 났다고 한다. 봉우리가 작으면  서도 봉우리가 세 개라 세봉아고도 한다.

들이름  골논 - 도장골 바로 밑에 논
건넌들 - 마을에서 길과 내를 건너가는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문앞논 - 마을 중앙부위에 있는 논으로서 대문 앞쪽에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끝동이들 - 끝쪽에 있는 논들을 가리켜 붙여진 이름이다.
 
         
‣ 부대앞
1964년도 미군부대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번덕지와 같은 지형으로 새능과 같이 편편한 언덕 지형이었다. 부대가 주둔하게 됨에 따라 부대앞 마을이라 부르던 것을 지금은 "부대앞"이라 한다.


‣ 고양골
검단산 자락에 고양이처럼 생긴(괭이봉) 봉우리가 마을 뒤쪽에 있어 이 마을을 고양골이라 불렀다. 또한 옛날에는 고얌나무가 많았다고 해서 고양골이라 한다고 전해지는데 이것은 일종의 속어에서 나온 이름이 아닌가 생각된다. 현재 고양골은 높을고(高)에 볕양(陽)자를 쓰고 있다. 높은 지대의 양지바른 골짜기라 해서 고양골이라 부르지 않았나 본다.

산이름 - 고양봉(괭이봉)
계곡이름 - 상학이, 중학이(학의 혈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 배내미(배가 넘나들던 곳), 수린바위(수릉, 수리가 있었다 함), 큰참나무 밑.


‣ 열동마을
고속도로 공사로 인하여 이주한 주민들로 형성된 마을(10가구)


‣ 은골(隱谷)
앞 냇가에 옛날에는 고기가 많았다. 사람들이 고기를 잡으러 가면 고기들은 골짜기에(계곡에서 내려오는 물) 숨는다고 해서 고기魚자와 숨을隱자를 써서 어은골이라 불리웠다 한다. 세월이 지나면서 은골이라 불리어지고 있다. 은골에 마을이 집성하게 된 것은 지금으로 부터 160여년 전 심상운 전 동부면장의 5대조께서 건너편 검단산 자락 중터말에서 제일 먼저 집을 짓고 이사를 와서 한집, 두집 들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 근래에 와서 43번 국도 확장공사와 중부고속도로가 생기면서 집들이 헐리게 되어 지금은 단 몇 채 남아 있지 않다. 은골의 윗쪽 계곡에는 광덕암이 자리하고 있다.

계곡이름 - 독바우골(바위모양이 독 처럼 생겨 붙여진 이름,
진응달(햇빛을 전혀 보지 못하는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
저쪽골 - 저편 너머 골짜기를 가리켜 일컫던 말


‣ 중투말(중터말)
옛날 서당이 있었던 곳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학자들의 사당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이 마을이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보아 중터말, 또한 마을 뒤쪽 산에 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절터말-중터말)일 것 같다.


‣ 돌댐이
이 마을은 중투말 옆에 위치하고 하산곡과 창우동의 경계지점의 마을이다. 이 마을은 돌이 아주 많아 돌댐이 마을이라고 불려졌다.
산이름 - 모분정(모범림) 옛날 정부에서 산에 나무를 시범적으로 심어놓은 곳이다.
바위이름 - 멍석바위개(멍석처럼 넓은 바위라 하여 이름지어졌다.
노루바위(노루들의 서식처 또는 많이 나타나 놀던 곳.
들이름 - 사흘갈이 밭, 끝댕이


‣ 천현동
천현동은 현재 행정동명인 동시에 법정동명이다. 천현동은 상산곡동, 하산곡동, 창우동, 배알미동의 법정동을 관장하는 행정동명이다. 천현동은 샘재, 동경주, 봉화골, 선린촌, 다리건너마을로 형성되는데 다리건너 마을은 신장2동의 마을과 중복되는 동부파출소가 위치한 마을이다.


‣ 샘재
샘이 많이 나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마을을 들어서기 전 고개를 넘어야 하기 때문에 샘재라 했다. 새미길을 따라 가다보면 목이 말라 샘물을 먹기 위해서는 동경주에서 고골쪽으로 고개를 넘어가야 한다. 샘재는 동경주에서 한 고개를 넘으면서 마을이 나오는데 이 마을을 바깥샘재라 했고 지금의 교산동을 안샘재라 했는데 바깥 샘재에서 안샘재로 넘어가는 경계에도 고개가 있었다. 이 고개 이름을 곰부닥(곰보댁)고개라 했다.


‣ 봄부댁
고개 바깥 샘재에서 안샘재로 넘어가는 고개(천현동과 교산동 경계)로 봄부탁,범부댁, 봉부택, 곰보댁 등 사람마다 발음에 차이가 있으며 곰부닥 고개라고도 한다. 내가 성장한 곳도 이곳 주변인데 할머니께서는 보무덕 고개라 불르셨다. 아마도 옛날에는 곰이나 범이 자주 눈에 띠어 이렇게 불려진것이 아닌가 한다.


‣ 말랑지
동경주에서 샘재로 들어가는 곳에 성황당을 지나면 마을이 시작되는 곳에 야트막한 고개가 있었는데 그 야트막한 산을 말한다. 현재는 도로가 나 왼쪽의 집들이 없어졌고 고개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 모롱고지
현 샘재 마을회관 옆으로 실개천이 있다. 실개천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만남의 광장 위쪽에 있는 논들을 모롱고지라 불렀다.


‣ 개울개
현 성광학교 근처. 아래쪽에 개울이 있는데 모롱고지 실개천과 교산동에서 내려오는 개천이 만나는 곳이다. 개울이 있기에 샘재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가리켜 개울개 라고 한다.


‣ 굴청
지금은 천현동 택지개발사업으로 주택이 들어서 옜 모습을 볼 수 없지만 택지개발 사업 이전에는 논들이 행길보다 깊게 형성되어 굴청이라 했다고 생각된다. 작은 다리가 있는 개천에서 물을 대어 농사를 짓던 곳이기도 하다. 개울 바닥보다 낮은 지역이기도 하다.


‣ 마뜰
만남의 광장 아래쪽의 논들이다. 만남의 광장이 생기기 전에는 마뜰에 3가구가 살았었다. 지금은 수리시설이 있는 곳에 한가구만이 남아있고 마당모양처럼 넓은 지역이라 마뜰이라 했는지도 모른다. 만남의 광장이 들어서기 전에는 천현동에서 가장 넓은 평야지대 였다.


‣ 작은 버들이
마을 아래쪽 지금의 동부파출소 앞쪽의 평야지대를 가리켜 작은 버들이라 했다.


‣ 봉바위
매봉이라 불려지는데 이곳에서 3.1운동 당시 봉화를 올리며 만세 시위를 벌이던 곳이기도 하다

‣ 동경주(東京州)
남한산성에서 내려다 보면 동쪽으로 있는 경안(京安)쪽에 있는 고을 이라고 해서 이 마을을 동경주라고 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는 신라가 이 지역을 점령하고 고골에 신주(新州)를 설치하면서 동쪽의 큰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오랜 기간 세미길을 관리하기 위해 관리가 상주하던 곳으로 조선 초기에는 동헌이 있었고 동부면 소재지가 있던 곳이다. 지금은 도로로 인해 옛날의 흔적은 없지만 마방집 만이 아직도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어 그지역이 관리들이 말을타고 빈번히 드나들던 곳이라는것을 짐작하게 한다.

 
‣ 봉학골(鳳鶴谷)
봉학골 또는 봉화골 이라 한다. 이 마을이 위치하고 있는 골짜기가 마치 봉황새가 날개를 편 듯 하다고 하여 鳳자를 썼고 또 옛날에 어느 부자의 묘가 이곳에 있었는데 이장을 하려고 묘를 파니 이곳에서 학이 날아갔다고 해서 鶴자를 써서 鳳鶴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는 일설에는 3/1운동 때 봉화를 올렸던 곳이라 봉화골이라고 부른다고도 하지만 정확한 것은 이지역 산소들 묘비에 봉학동이라 표기된 것으로 보아 오래전부터 봉학이란 지명을 사용하엿던 것으로 보인다. 이 봉학골 산 계곡은 옛날 큰 절터였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기와편이 많고 절에 있던 금부처 12분상이 묻혀있을 가능이 높다는 말도 전해진다. 
지금은 하남인터체인지가 들어서면서 동리의 모습은 사라져 옛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 선린촌
1960년대 새로 계획성 있게 생긴 문화촌으로서 그 다이 강동구 길동에서 양계를 하며 살던 실향민들이 도시계획에 밀려 이곳으로 이주하여 계사와 주택, 교회를 지어 기독교를 신봉하여 건설한 곳이다. 선린촌 사람들은 거의가 다 기독교 신자들로서 사랑과 우애로 문화생활을 하며 하남시에 최초로 선린 신용협동조합도 결성하여 모범마을을 만들었다. 동경주에서 산곡쪽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선린촌이 있다.


‣ 염버들이
큰 수양버들 나무가 수염처럼 늘어져 있는 모습을 보고 이 일대 논들을 염버들이라 불렀다.


‣ 창우동(倉隅洞)
백제가 하남 위례성(고골)에 도읍하고 있을 때 한강의 물길을 이용하여 화물을 싣고와 이곳에 보관하였다가 위례성으로 옮겼다고 하는데 창고가 있던 모퉁이라 하여 창모루(창모롱의 변화)라 부르다가 한자로 표기하면서 倉隅里가 되었다.


‣ 작평리(작밭들)
까치 작(鵲), 들 평(坪)자를 써서 작평이라고 하였다. 다시말해 까치가 밭과 들에 유난히 많았던 지역으로 까치작를 써 작밭들 또는 작밭뜰 이라는 지명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일부 사학자들은 작평이란 지명은 국가에서 운영하던 둔전을 이야기 한다고도 한다.

 
‣ 창모루
창모루는 두미강변에 위치하고 검단산 끝자락에 있어 옛날에 세미(稅米)를 하역 보관하던 창고가 있었고 산모퉁이에 자연마을이 형성되어 팔당역으로 건너가는 나루터가 있었던 마을로서 옛날 백제 초기부터 포구로 번성하던 곳이다. 면사무소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즉 창고가 있고 그 모퉁이에 위치하고 있다하여 창모롱이라 하였다고 하며 시간이 지나면서 창고모퉁이 나루-창모롱-창모로-창모루로 변하여 지금에 와서는 전부 창모루라 불리게 된 것이다.


‣ 안창모루(내창,안창)
창모루 나룻터에서 이 마을이 안쪽에 있다하여 안창모루라 했고 내창과 안창이라고도 많이 불리고 있다.


‣ 바깥창모루(외창)
 검단산 끝자락에 위치한 마을로서 창모루 마을의 바깥쪽에 위치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산골
이 마을은 아랫산골이다. 상산곡동을 일컬어 윗산골이라고 하고 창우동을 아랫산골이라 했다. 산이 있고 골이 많다는 것에서 붙여진 지명이다.

‣ 한우물둥치
검단산 호국사로 올라가는 길 옆에 샘이 흐르는 작은 우물이 있는데 이 물은 동네주민이 먹는 유일한 식수였다. 지금은 옛 우물터는 메워지고 파이프를 연결하여 밑으로 옮겨놓고 등산하는 사람들의 갈증을 해소하는 쉼터가 되고 있다.


‣ 개구장께
호곡골 위 호국사 못미쳐 계곡물이 흐르고있는 곳인데 1996년까지만 해도 징검다리로 있던 것을 호국사에서 다리를 놓아 호국사의 신도 뿐 아니라 등산객들의 차량 통행이 훨씬 수월해졌다. 이곳은 개구리가 많던곳이었다 하여 개구장께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곳은 계곡물이 좁아지면서 후미진 곳으로서 다시 계곡이 넓어지는 곳. 다시 말해 계곡을 여는 곳, 그래서 개구(開口)장께라 한다고 본다.


‣ 호곡골
횟곡골이라 불리워지던 것을 어원 변화로 인해 호곡골이라 전해진 듯하다. 옛날에는 이곳이 회를 캐던곳이라 횟곡골이라 불렀을 가능성이 많다. 호곡골에는 호랑이와 백여우가 많이 나타났기 때문에 호곡골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주방도 만만치 않다.

* 계곡이름 - 세미내미, 우물배기, 복막골, 얼어죽은묘이께, 북바위께, 우물배게, 위에께 셔덜, 동그랑 셔들, 깊은골, 곱돌구덩이
* 절이름 - 호국사(검단산 호국사 범종이 있고, 천불전, 약사여래불, 약수, 호국연화회운영)
  정심사(하산곡 경계에서 절터말 쪽으로 올라가면 정심사 도착, 조계종)


‣ 절터말
옛날 절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고 근래에 돌부처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데 정심사에서 위로 더 올라가야 함.


‣ 까치납논
지금의 광장주유소를 짓기 전까지 논으로서 이 논의 지명이 까치납논으로 불리었다. 옛날에 까치가 많이 않아 있었던 곳으로 날씨 추운 겨울에는 까치가 많이 얼어 죽었다는 우스개소리가 전해오는 곳이다.


‣ 장기영 묘
부총리를 역임하고 한국일보 창업주이다. 에니메이션고등학교 주변


‣ 유길준 묘
한말 개화기 학부대신과 내부대신을 지내고 "서유견문록"을 저술하였다. 에니메이션고등학교 옆쪽 검단산 오르는 중턱

* 계곡이름 - 혹곡루, 큰독바골, 깊은셔들, 수린바위, 등우리박골, 속봉, 빨딱고개, 지방골, 성아바위, 문바위안, 배몰, 병목골, 작은양지, 때재, 독바위, 절터, 호랑굴


‣ 원쟁이(뱀골마루턱) 고개
6.25당시 중공군과 미군이 제일 많이 사상자를 냈던 격전지였다는 곳.


‣ 성아바위
나룰에 사는 산옥이라는 6살짜리 여자애가 호랑이에게 물려가 5일만에 찾은 곳이 이곳이다.


‣ 물문께
수리조합 용수문이 있는 곳이라 물문께라 했다.


‣ 건너말
물문께 동네를 보고 건너마을이라 했는데 이마을 사람들도 서로 건너말이라 부른다.
계곡이름 - 북대골, 작은 독바골, 연못골, 매봉, 말린발, 넓은버던, 작은골, 큰골, 늦은매기


‣ 일해갈이(이레갈이)
7일동안 밭갈이를 하는곳. 북대골 마루턱


‣ 독바위
옛날 어느 힘센 장수가 독바위를 갖고 공기돌을 가지고 놀듯 했다는 설화가 있다.


‣ 물개말
바깥 창모루를 속칭 물개마을이라 했다. 두미강변에 마을이 있어 물가에 있는 마을을 물개말이라 했다.
계곡이름 - 제청말, 여우박골, 묘이다섯굴청, 닭바위
들이름 - 개안(장마때면 물이 넘쳐들어와 개흙뻘이 되는 논들이다. 이곳을 개안이라 한다.


‣ 도드머리
개안에서 개울너머쪽 벌판이다. 이곳은 개안보다 지대가 높았으며 얼음 창고가 있었다. 40년전에 서빙고식으로 강이 얼어붙으면 그 얼음을 잘라 운반하여 구덩이를 파 놓은 뒤 왕겨를 넣어 저장한 다음 여름이 되면 얼음을 팔았다고 한다.


‣ 바뎅이 나루(팔당나루)
바깥 창모루 동북쪽에 있는 한강의 나루터. 남양주시 와부읍 팔당리로 건너감.


‣ 배알미동(拜謁尾洞)
조선조 제4대 세종대왕께서 여주에 있는 벽절(신륵사)를 유람하시고 한양으로 돌아오시다가 이곳에 와서 삼삭산의 꼬리부분이 보이므로 그곳을 보고 배례(拜禮)를 해서 이곳을 배알미라고 했다는 설이 있으나 이는 믿을 근거가 없는 것이고 다만, 원래 광주군에 있던 세종대왕의 능이 있던 곳을 향해 배알하였을 것이라는 이야기와, 또는 신하가 멀리 외지로 나갈 때 궁성에서 멀어지는 곳에서 혹은 궁성으로 들어올 때 임금이 있는 방향을 향하여 "배례"하는 관습이 있기로 생겨난 지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어학적으로 볼 때는 "배갈미(船葛尾)" 가 변한 말로 보는 편이 온당한 견해일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곳은 한강가에 있으므로 "배"는 "拜"가 아닌 "배(船)"일 것이요, 또 "갈미"라는 지명은 원래 흔한 바가 있어 "배를 갈아타는 곳" 의 의미일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의 설은 이곳의 지형으로 볼 때 양쪽이 깎아지른 비탈로서 마을이 계곡아래쪽 비탈 마을에 형성되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비탈밑에 있는 마을 즉 비탈 밑이라 하였는데 여기서 비탈은 경기도 방언으로 비알이라 했다. 비탈밑-비알밑 이것을 한자어로 표기하다보니 배알미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 윗배알미
배알미동은 아랫배알미와 윗배알미로 구분되는데 댐위는 호반이 되고 광역상수도 펌프장 위쪽으로 4가구 집이 있다.


‣ 아랫배알미
앞말, 물개말, 건너말, 웃말이란 소지명으로 불려지는 마을이며 건너말에는 서울에 공급에는 상수도 펌프장이 들어서 있다.


‣ 살치바위
강가에 있는 바위로서 배를 바위에 기대 세워놓고 배를 타고 않아 낚시를 하던곳. 이 부근에서는 고기가 많이 잡히고 살치떼가 살고 있는 터라 하여서 살치바위라 했다.


‣ 승마구미
아랫배알미 동북쪽에 있는 마을


‣ 계곡명
소내골, 정직끼미, 소골, 장구맥이, 농골, 큰골, 새나무터, 닭바위, 홍장굴(상수도공사)


‣ 도미나루(도미진)
아래배알미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한강의 나루터.  도미설화는 삼국사기 및 조선시대 상감행실도에 실린 우리나라 정절여성의 표상으로서 우리지역의 대표적 설화이며, 지명이다. 도미진은 남한강을 오르내리던 세곡선 및 상인들의 휴식을 위한 원이 설치되었을 정도의 커다란 포구였으며, 그 이름은 두미원이다. 현재는 강가의 나루터 흔적만 남아있다


‣ 교산동(校山洞)
춘궁동내의 법정동으로 원래는 동부읍 교산리였으나 1989년 하남시로 승격되면서 춘궁동으로 편입되었다. 향교의 교(校)자와 객사의 산(山)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옛날에 군, 현에는 그 고을 유생을 교육시키던 향교 즉 현재의 학교가 있었다. 대개 향교가 있던 곳에는 지명에 교자가 들어있다. 1703년(숙종29년) 광주향교가 이곳으로 옮겨오기 이전에는 광주부윤, 유수가 군치를 하던 치소가 있던 곳으로 광주의 행정중심지 였다. 그러던 것이 1626년에 군치소를 남한산성으로 옮겨가고 난 후 77년 후인 1703년에 이성산성 밑 향교고개 중간우측에 있던 향교를 어느 국구(國舅) 심씨가 권력으로 교산동 현위치로 옮겼다는 전설이 있다. 교산동의 향교말과 안샘재의 자연마을이 있다.


‣ 안샘재 - 샘재의 안쪽마을을 말한다.


‣ 향교말 - 향교가 있는 마을을 가리킨다.


‣ 부처골, 또는 부처거리 - 교산리 중앙(안샘재)에서 북쪽의 일부, 옛 절터가 있던 곳이라 한다.


‣ 나무골 - 교산동 45번지 일대, 선법사 올라가는 길쪽의 골짜기로 옛날 나무하러 다니던 길이라 하여 나무골이라 한다.


‣ 칠성바위 - 이웃 할머니들이 가정을 위하여 치성을 드리던 곳으로 현재 바위가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


‣ 구유고개 - 옛날 가막소(유치장)가 있었다 하며 죄인들이 넘어다니던 고개라 하여 구류고개라고도 한다.


‣ 담  안 - 현재 교산동의 토성이 있는 이곳 안쪽에 집이 있어서 담안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 생고개 - 주민들이 향교마을에 왕래하기 위하여 산기슭으로 돌아서 다니다가 거리가 멀어 직행하기 위하여 인력으로 산을    파헤쳐 생길을 만들었다하여 생고개라 불렀다고 한다.


‣ 여가산 - 여씨의 산이 있고 여씨 가문의 묘소가 있다고 하여 여가산이라 부른다고 함.


‣ 상사창동(上司倉洞)
이 마을은 조선시대 동부면 사창리(司倉里)의 대칭명으로 웃말에 속했기 때문에 상사창이라 한 것이다. 사창리란 공창(公倉)이 있던 곳으로 창우포와 둔지 등 한강 수로로 운반된 세물(稅物)들을 보관하던 창고가 있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법화골, 샘골, 중터말의 자연부락이 있다.


‣ 법화골(法華谷)
지금은 없어졌지만 옛날에는 법화암(法華庵)이라는 암자가 있었다고 하며 지금도 일부 불상과 부도가 남아있다. 또한 조선조 인조때 병자호란당시 청태종의 매부인 양고리가 우리나라 원두표 장군에게 패하여 전사하자 전쟁이 끝난 후 그의 영혼을 달래기 위하여 남한산성 북문밖에 암자를 지어 그 이름을 양고리의 고향이름인 법화둔(法華屯)을 따서 법화암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법화골은 법화사지 아래 장씨의 집성촌이 있는데 이 마을을 법화골이라 한다.


‣ 샘골
법화동 아래쪽에 샘이 잘나오는 우물이 있었다고 해서 샘골이라 하는데 예전에는 "시암골"이라고도 했다.


‣ 중터골, 중촌(中村)말
중문동이라고도 한다. 이 곳의 서당엔 위, 아래마을에서 와 공부를 하니 자연 가운데 말로 중문동(中文洞)이라 하였는데 그 후에 말이 변하여 중터말이 되었다.


‣ 하사창동(下司倉洞)
상사창의 대칭어이다. 이곳에 원래 사창(司倉)이 있었고 그 터의 주춧돌이나 대석들이 지금도 많이 산재해 있다. 일설에는 큰절이 있었다고도 한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철불중에 가장 큰 부처상이 바로 이곳 하사창에서 가져간 것이며 현재도 대석은 이곳에 남아있다. 이곳은 가운데말, 되촌말, 벌말, 처골, 사리말, 아랫말 등의 자연 마을이 있다


‣ 가운데말 - 하사창에서 한중간에 있는 마을이다.


‣ 아랫말 - 하사창리 자연마을중 가장 아랬족에 위치하였다 하여 아랫말이라 한다.


‣ 되촌말 - 이곳 지형이 곡식을 헤아리는 되(升)처럼 생겼다고 해서 "되촌말"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 사리말 - 이 부락도 석불과 사리탑이 많았었기 때문에 사리말이라 하나 일제때 일본사람들이 이 일대의 유물들을 모조리 다  지고가 지금은 형태도 없다.


‣ 벌말
옛날에 철불이 있었기 때문에 부처골이라고도 한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철불도 이 마을에서 나온것으로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들이 가져 가다가 개성에 버리고 간 것을 6.25때 국군들이 다시 경복궁으로 가지고 왔다. 이 와중에 팔이 부러졌는데 그 좌대가 부처골에 있었으나 고압선 철탑공사 때 없어졌다. 이 마을이 넓은 벌판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벌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벌말이라면 한자로 쓸 때 "野村" 또는 "坪村" 이어야 하겠으나 여기서는 발음대로 "벌말"이라 쓰게 된 것이다.


‣ 항동(項洞)
행정동인 춘궁동에 속한 법정동명이다. 고골에서 남한사성에 오르는 길목에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는 이 마을이 산으로 나무하러 다니는 길목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목도"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에 목(木)을 항(項)으로 고쳤다. 나무길과 왜골, 황골의 자연마을이 있다


‣ 나뭇길(木道)
옛날부터 이 마을은 땔나무로 생계를 유지하던 마을이라서 생긴 이름이다. 특히 초동들이 나무하러 가며 길싸움을 하였다 하여 초동목도싸움이 민속놀이로 전하여 왔다. 이 마을엔 500년 이상된 은행나무가 있어 유명한데 옛날에는 이 나무에 제사를 지내 마을의 풍요나 안녕을 빌었다 한다.


‣ 왜골, 오야곡(梧野谷)
오야곡이라고도 한다. 오동나무가 많아 오야곡이라 하나 이는 와전된 듯 하고 이곳에 사는 윤씨들의 선조 묘비나 족보에 보면 이곳은 와야곡(瓦野谷) 즉 기와를 굽던 골짜기였다. 그 와야곡이 왜골로 변한 것이며 지금도 이 일대에서 기와 무더기가 발견된다


‣ 황골(황토골)
황토골이라고도 하는데 지질이 황토가 많기도 하지만 가을에 이곳 전답의 곡식이 익으면 경사면이라 아침햇살이 비치면 황금빛으로 아름답게 보여 붙여진 이름이다.


‣ 석문자(石文字)와 법륭사 필적(法隆寺 筆跡)
뒷산절터에서 일본인 鳥居龍藏박사가 발굴한 깨진 그릇에 한글도 아니고 한자나 범자(梵字)도 아닌 꼬불꼬불한 상형문자가 새겨있었다하며 기와장에 법륭사(法隆寺)라 쓰여진 것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일본 법륭사의 벽화글씨와 필법이 같다고 한다


‣ 춘궁동(春宮洞)
춘궁동은 백제의 도읍지(하남위례성) 이전에는 이곳에 사람도 많지 않고 농토가 별로 없고 주위가 산으로 둘러 싸여 봄이 되면 마을에 기근이 들어 춘궁리(春窮里)라 하던 것을 백제의 온조왕의 궁궐이 자리잡게 된 후에 춘궁리(春宮里)라 불리었다 한다. 그러나 춘궁동은 조선시대부터 일컬어 오던 춘장동(春長洞)의 춘(春)자와 궁말(宮村)의 궁(宮)자를 합쳐 만든 명칭으로 상사창, 하사창, 항, 교산동을 관장하는 행정동명을 겸한다. 이곳은 또한 "고골"이라고도 한다. 고골이란 古邑, 즉 고고을의 준말이다. 춘궁동은 궁안, 춘장, 버구리, 선산동의 자연부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 궁안
이 곳은 백제시대 궁궐이 있었다는 곳으로 궁안 또는 궁촌이라고 부르며 지금도 그 유적지가 있다.


‣ 춘장(春場)
이성산성 아래 부락으로 궁터가 있었다 하나 정확한 고증은 없다. 이 부락은 햇살이 일찍 들어 봄이 일찍오고 늦게 간다하여 춘장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항상 아늑한 곳으로 봄의 느낌을 갖는다.


‣ 버구리
법동(法洞)이라 하는데 법우리-버구리로 변했다. 이곳은 백제의 도읍당시 법과 규율을 관장하던 관청이 있던 곳이라 한다.


‣ 성산동(聖山洞), 선산동(仙山洞)
선산동은 성산동과 같은 의미의 명칭으로 이성산 줄기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이라 하여 성산동(城山洞)이라 칭하기도 했으며 최근에는 발음하기 쉬운 선산동으로 불리고 있다.


‣ 행기리
백제 시대에 궁이 잇던 이 마을 앞으로 큰 행길(行路)이 났다고 해서 이 마을을 "행기리"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 동사터(桐寺址)
고골 저수지 위에 있는 절터로 1980년대 발견되었는데 그 이전에는 대원사란 조그마한 절이 있었다. 동사지는 절터 주초만 남았는데 그 규모가 굉장히 커 백제의 국사(國寺)터로 추정되며, 삼층,오층석탑이 있다.


‣ 신장동(新長洞)
1914년 행정구역을 다시 조정할 때 신평리(新坪里)와 장례촌(長禮村)을 합하여 신장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곳은 원래 돌이 많아 석바대라고 불렀으나 1926년 방규환이라는 사람이 한강물을 이용한 수리시설을 만들어 그 이후 농토가 좋아졌다고 하여 신장이라고도 한다.


‣ 더우개
한강변에 있는 마을로 이곳에서는 수로를 이용한 물물교환을 하던 포구가 있었는데 이 포구 이름을 덕오포(德五浦)라 하였다. 혹은 포(浦)의 우리말 개(浦)를 붙여 "덕오개"라 하였으니 이 말이 변하여 "더우개"라 하였다.


‣ 신정(新亭)
더우개 마을을 일명 신정이라고도 한다. 이 이름은 근거가 구전이나 속어에 의한 것이 아니고 이 마을을 형성한 사람들이 당정섬에서 살다가 1925년 을축년 홍수때 이곳으로 이주한 배천조씨(白川趙氏)들이 주축을 이루어 거주하면서 당정(堂亭)섬에서 살다 새로 마을을 이루었다 하여 신정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 새뜰
한강변의 마을로 홍수가 지면 한강물이 넘쳐 황폐하면 땅을 못쓰게 되었으나 수리시설이 설치된 이후로는 홍수의 피해가 없이 농사를 지을 수가 있게 되었다고 하여 새뜰(新坪)이라 하게 되었다.


‣ 석바대(石海坪)
신장동은 조선시대 팔당리에 속했었다. 팔당리를 속어로 "바댕이"라 한다. 수운시대 때 고골의 관아로 세미들을 운반하려면 한강변의 바댕이(창우동) 포구에 물건을 하역했다. 그러나 여름철 한강이 범람하면 바댕이와 고골은 육로가 두절되게 되어 덕풍천을 따라 배가 올라와서 지금의 덕보교 근처에 하역을 해야 했다. 이 때 이곳을 "속바댕이" 창우동쪽을 "바깥바댕이"라 했다. 속바댕이가 자꾸 변하여 속바댕-속바대-속바대로 변한 것이다. 또 일설에는 신장의 중심이 되는 마을인데 이곳에는 바위와 돌이 하도 많아서 "돌이 바다처럼 많다"라고 해서 석바다라 하게 되엇다고 한다. 그러나 석바대란 뜻은 돌바다라기 보다는 돌밭이란 의미에 더 가깝게 보인다.


‣ 장예말(長禮)
옛날부터 이 마을은 살기가 풍족하여 이웃 마을에서 쌀을 많이 꾸어다 먹었다고 한다. 꾼 쌀은 장리(長利:그해 농사를 지어서 갚음)로 갚았는데 이 쌀을 장리쌀 - 장예말 쌀이라 하고 자예쌀을 주는 마을이라 해서 "장리마을"이라 했는데 이 말이 변하여 "장예말"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마을 밖으로 신작로(42번국도)가 개설되고 이곳이 신장예말이다. 그 지명이 간략하게 줄여져서 신장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소청벌(들) 신평리 동쪽에 있는 벌


‣ 장터말
신장동 427번지 일대는 관개가 잘된 논이었다. 43번 국도와 광주수리조합 수로가 교차하는 이 지점에서 1958년 처음으로 5일장이 개설되어 매4일,9일에 장이 섰다. 그로 인하여 이 일대는 상가가 형성되고 장날 국밥등을 파는 주막이 처음 들어서면서 마을을 이루니 장터말이다.


‣ 다리건너
덕보교 건너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 옛 신장운수 차고가 있었고 천현동의 일부와 겹쳐져 있다.

 
‣ 동촌말
이 마을은 덕풍천변에 무허가 건물이 들어서면서 형성되었다. 개울 주변에 한집 두집 생겼으며 덕풍천이 범람하면 이재민이 발생하던 곳이었다. 장예말 동쪽에 있다하여 동촌말이라 하였고 현재의 시청이 위치한 주변이다.


‣ 덕풍동(德豊洞)
통일신라시대에 고골에 군사 근거지인 정(停)이 설치되고 이 정의 명을 전달하는 역(驛)을 이곳에 설치하였는데 그 역이름을 덕봉(德鳳)이라고 하였으며 뒷날 "덕봉"이 변하여 덕풍이 되었다고 한다. 지명에는 주민의 소망이 담기기도 하는데,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이곳에는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샘이 있으니 이 물로 농사를 지어 풍년이 되어 마을 사람들은 "샘의 덕을 입어 풍년이 되었다"고 하여 이 마을 이름을 덕풍(德豊)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덕풍동은 옛날에 온천마을(현재 풍산동 온천마을)까지 포함하였는데 지금은 덕풍골, 역말, 독점말, 개사리로 형성된 덕풍1동과 수리골, 송정골, 말바위굴청, 안터골로 형성된 덕풍2동, 진모루, 범재고개, 한배미 뚝, 흑새기, 골안, 옥다리, 나룰, 방탱이로 형성된 덕풍3동의 행정동으로 구분된다.


‣ 개사리
이곳은 호랑이가 나온다는 범배고개 아래 마을이라 개가 지날때 꼬리를 사렸다(뒷다리 사이로 감추었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은 옛날엔 인가가 드물고 지나다니기도 섬뜩한 곳이었는데 학교와 면사무소 등이 들어서면서 중심가가 되었다. 현재의 하남문화원 주변.


‣ 독점말
지금의 남한고등학교 정문 건너편이며 하남단위농협 뒤쪽인데 지금은 주택이 들어서 있어 예전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1960년대 까지만 하여도 이곳은 장독을 점토로 빚어 옹기가마에 구워 만드는 곳이 있었다. "독점말"은 주로 장독옹기 만드는 곳이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 역말(驛村)
삼국시대로부터 조선시대까지도 이곳에는 역이 설치되어 있었으니 이 때부터 역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옛날의 주요 교통수단은 말이었는데 서울에서 50리마다 역을 두어 말을 기르고 관리하며 마패를 소지한 관리에게는 말을 내주었는데 이 마을에 역이 있어서 역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 덕풍골(德豊谷)
옛날에 역말(驛村)에서 덕봉골로 넘어가는 고개에 있는 옹달샘에서 봉황새가 날개를 치며 날아갔다고 하여 덕봉골로 부르다가 이 샘에서 물이 나오는 것을 이용해 풍년을 이뤘다고 하여 덕풍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곳 주변의 산세가 수려하고 명당이 많아 선성군(宣城君), 희령군(熙寧君)등 왕자의 묘가 있어 유명하다.


‣ 사리고개
이 사리고개는 옛날 둔지에서 고골로 이어지는 세미길인데 덕풍골과 초일동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사리고개에는 고려시대의 석불좌상이 2기가 있는데 어느시대엔가 머리가 잘려 없어졌으며 현대에 들어와 새로 머리부분을 만들어 올려놓았다. 지금의 사리고개는 중부고속도로가 되어 있다.


‣ 옻우물(약수터)
옻우물은 지금의 덕풍골 약수터를 말하는데 오래 전부터 이 옻우물은 옻오른 사람이 이 물에 몸을 씻고 마시면 깨끗이 낫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우물은 샘이 사시사철 소아나와 주위 사람들의 식수와 그 밑의 논에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 호랑바위
약수터 동남쪽 약 20m 지점에 큰 바위가 논자락을 끼고 있는데 이 호랑바위에 대한 전설이 있다. 옛날 정방이라는 아주 힘센 장사가 이 바위로 호랑이를 잡았다고 한다. 영물을 잡은 죄로 관가에서 곤장과 상금을 받은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 수리골
이 마을 뒷산의 형태가 마치 수리새가 날개를 펴고 있는 모습이라 하여 수리골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것을 한문으로 표기해서 취곡(鷲谷)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한 수리골은 조선시대 각 지방 관아의 여섯 영리아전(營吏衙前)중 으뜸이라는 "수리(首吏)" 관명중에 하나인데 이방아전을 일컫는 말로서 수리의 관직에 있는 사람이 살던 곳이라 하여 수리골이라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본다. 밝달문화연구소장 이종탁의 논문에 의하면 마한왕이 이곳에 왔을 때 도읍지로 활거한 바 드느물, 미사리, 덕수 등의 진한 계통의 지명이 수없이 산재한 것을 볼 때 수리골이란 "으뜸꼴", "수도", "도읍지"란 뜻이 된다고 하였다. 수리골은 바깥수리골과 안수리골로 나누어진다


‣ 안터골
안터골은 삼태기 안처럼 생겨 아늑하게 보이는 마을인데 여기를 "안터"라 하였다. 지금의 송도연립이 있는 자리이다.


‣ 송정골
약수빌라가 있던 자리이다. 이곳 골짜기에는 잘생긴 노송 소나무가 많이 있어 마을 사람들이 이곳을 정자삼아 놀던 장소이며 해방 후 까지도 소나무가 있어 밭에서 일하던 사람들의 쉼터로도 좋은 곳이었기에 "송정"이라 불렀다.

‣ 말바위굴청
말바위는 "큰바위"란 뜻이다. 굴청이라는 것은 고랑이나 골짜기를 뜻하는데 송정골 골짜기에 큰 바위가 하나 있는데 이 바위를 "말바위"라 한다. 이곳 골짜기에서 사람들이 떠들면 말소리가 골짜기를 타고 산울림이 된다. 이 메아리 소리가 바위에서 들리는 것처럼 생각되었는지 바위가 말을 한다고 여겨 이 바위를 말바위라 하였다고도 한다. 말바위가 있는 굴청이라하여 "말바위굴청"이라 하게 된 것이다.


‣ 서낭댕이
풍산동과의 경계지점인 지금의 덕풍파출소가 있는 고개 마루턱에 성황신을 모신 당나무가 있었다. 이곳을 가리켜 서낭댕이라고 하는데 성황당이 변한 말이며 그 의미는 같은 것이다.


‣ 범재
이 고개에는 호랑이가 나온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지금의 주택은행과 국민은행 사이에 있는 고개의 옛이름이다. 호랑이에 대한 전설도 전하여 오고 있다.


‣ 봉바위
수리골 뒷산 정상에 올라보면 두개의 큰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바위를 멀리서 보면 부엉이 형상을 닮았다 하여 "부엉바위"라 한 것이 "봉바위"로 어원이 변한 듯하다. 또한 봉우리를 이룬 바위라하여 봉바위로 불렸을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 진모루
국민은행이 있는 범재고개부터 천주교 신장성당과 엘칸토까지는 길게 뻗은 얕은 산자락이었다. 이 산자락 밑은 마을을 "진모루"라 했다. 여기서 "진"은 "긴(長)"의 경기도 사투리로서 긴 산자락에 있는 마을, 모루는 산자락의 뜻과 모퉁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데 진모루는 긴산자락-긴모루-진모루 가 된 것으로 보인다.


‣ 흙새기
현재 덕풍3동 사무소 앞쪽 초원연립 부근으로서 수리골 산에서 장마때 비가 많이 오면 토사가 밀려 내려와 흙이 수로에 쌓이는 곳이라 수로에 토사가 수로에 밀려들어가지 못하도록 모래방죽을 쌓아 설치하는 곳이다. 흙이 쌓이는 곳(흙쌓이-흙쌔기-흙새기)로 변화한 것 같다.


‣ 한배미 뚝
한배미 뚝은 쉽게 말해 한 배미의 큰 논에 둑을 쌓아 겨울 동안 물을 가두어 두었다가 농번기에 가뭄이 오면 아래 들녁에 물을 대주는 역할을 한다. 지금의 덕풍시장이 있는 자리이다. 당시 한배미 뚝 일대가 모두 택지개발이 되어 그 때의 모습은 알아볼 수 없다.


‣ 방죽뜰
방죽뜰은 나룰 가기 전의 넓은 들판이다. 이 방죽뜰은 광주수리조합의 수리시설을 이용하는 논이라 "방죽뜰" 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 나룰
나리울의 준말로 생각할 수 있으며, 나리는 들의 옛말로서 이 마을은 들녘에 둘러싸인 마을로서 "나리울"이라고 부르던 것이 어원변화로 "나룰"로 줄여 부르게 되었다. 또한 이 말은 나래틀 또는 나틀이라는 이름에서 기인한다고도 한다. 나래는 나래질을 해놓은 것처럼 반반하고 평평하다는 말이며 틀은 뜰과 함께 넓은 들을 일컫는 뜻이다.


‣ 왕바위산
나룰마을 뒷산이다. 야산으로 산정장에 아주큰 바위가 있다. 이 바위를 "왕바위" 라 하여 자연히 산이름도 "왕바위산"이라 하였다.


‣ 쌍바위
왕바위산에는 쌍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쌍바위는 나룰 마을을 들어서면서 길에서도 보이는데 쌍바위 가운데 한 개가 없다. 어느 해인지 모르지만 장마때 굴러 떨어져 지금은 한개만 남아있다.


‣ 월호(月湖)
이 마을은 나리월 이라는 말에 연원을 두고 있다. 이화산업 5공장과 강변도로를 접하고 있는 마을로서 옛날 샛강이 있었을 때 장마가 지면 마을 앞까지 물이 들어와 늪지를 이루고 물이 빠진 뒤에도 깊은 곳은 호수와 같았으며, 호수의 생김새가 마치 달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나리월"이라 하던것을 한자로 "월호"라 하였다 한다.


‣ 옥다리
나룰에서 서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광주수리조합수로에 다리를 놓았는데 이 다리가 굽어 휘어진 것을 보고 "옥다리"라 부르게 되었다.

‣ 골안
덕풍파출소 앞쪽에서 "나룰"로 넘어가면서 보이는 산 안쪽 마을로서 3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곳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골안"이라 하였다.


‣ 방탱이
이 마을은 미사리 조정경기장 건너편 들판에 있는 마을로서 방풍림을 조성하여 바람을 막고 있다해서 방풍마을-방풍이-방퉁 이라 부르던 것이 어원이 변하여 "방탱이"가 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행정구역상으로 볼 때 덕풍동에서 이 마을이 제일 끝부분으로서 튀어나와 보여 방탱이라 불렀을 가능성도 있고, 방죽의 물을 이용하는 넓은 들판이 있는 마을 모습을 보고 그렇게 불렀을 수도 있다. 토성(土城)과 관련하여 방어의 개념이 있던 마을이라 짐작하기도 한다.


‣ 풍산동(豊山洞)
풍산동은 미사동, 망월동, 선동, 풍산동의 법정동을 관장하는 행정동이다. 풍산동은 원래 황산리(荒山里)였는데, 덕풍리의 온천마을과 황산마을 일부를 각각 통합하여 두 마을 이름에서 한글자씩 떼어 "풍산동"이라 하게 되었다. 풍산동은 온천(더너물), 방아다리, 군량골, 황산, 진등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 방아다리
덕풍파출소 고개를 내려가서 오른쪽 집근처에 방앗간이 있었고 방앗간 앞에 다리가 있어 방아다리라고 한다. 또 일설에는 이 마을 앞으로 작은 냇물이 흐르는데 여기에 다리를 놓을 때 디딜방아에 쓰던 디딜나무로 다리를 놓았다고 해서 이 마을을 방아다리라 부르게 되었다.


‣ 더너물(溫泉)
이 마을 앞 우물은 물이 따뜻하게 흘러나와 겨울에도 얼지않고 김이 무럭무럭 난다고 한다. 그리하여 붙여진 이름이 "더운 우물" 이었는데 그 후에 이 말이 변하고 줄어서 더운우물-던우물-더누물로 변하여 "더너물"이 되었다.


‣ 진등
한강가에 있는 이 마을 앞에는 샛강이 있었는데 여기에 나루가 있었다. 수리시설이 되기 전에 이 마을은 한강이 범람하면 강물이 망월동쪽으로 흘러 고덕동 앞으로 이어져 배가 이곳까지 들어왔다. 그런데 그 위치가 높은 곳에 있다고 해서 오를 등(登)자를 써서 진등(津登)이라 하엿다. 광주수리조합 설립 당시 이곳에 뚝을 쌓으면서 그 뚝 위에 수로를 내어 선리로 이어지게 할 때 그 설계도상에 대(大) 뱅크(Bank-뚝)라 하여 이곳을 오방꼬라 하여 쓴 것인데 이 어원은 크다는 일본말의 "오"와 뚝이라는 영어의 bank의 복합어이다.

‣ 황산(荒山, 거칠뫼)
이 마을에는 자그마한 야산이 있는데 홍수가 지면 많은 토사가 내려와 이곳에 거칠게 쌓여 만들어진 산이라고 하여 "거칠뫼"라 부르게 되었고 한자로 표기하여 황산이라고 하게 되었다.


‣ 장수고개
지금의 황산고개로서 서울시와 경계하고 있는 하남시의 관문이다. 전설에 의하면 임경업장군이 잠시 이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고 하여 장수고개라 한다.


‣ 수근이골
현 영락경로원에서 군량골로 넘어가는 마을로 옛날에 전쟁시 작전계획 세우느라 수근수근하였다 하여 생긴 이름이다.


‣ 군량골
현재 공영사 앞쪽마을로서 옛날 창모루 나루에서 군량미를 하역하여 이곳에 쌓아놓았다 해서 군량골이라 한다. 지금은 농장으로 유명하여 서울농장이라는 명칭이 더 잘 알려져 있다.


‣ 고개너머(아리랑고개)
방아다리에서 한진식품 옆 골목으로 들어가서 500m쯤 가면 작은 고개가 나오고 고개 넘어에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 사람들은 안동네를 고개 너머라고 한다. 이 고개로는 상여가 넘지 않는다는 풍습이 있었다. 흑연이 많이 나왔던 곳이기도 하다.


‣ 서낭당고개
덕풍파출소 앞 고개를 서낭당고개라 했다.


‣ 망월동(望月洞)
옛날에는 이 마을 앞으로 한강의 지류가 흐르고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이 강포구에서 달을 바라보았다고 해서 이 마을을 망월포(望月浦)라 하였는데 그 후에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망월동으로 되었다.


‣ 구산(龜山)
이 마을 뒷산의 모양이 거북이가 엎드려 있는것 같다고 해서 마을 이름을 "龜山"이라 하게 되었다. 이 마을은 천주교 박해 때 은거한 천주교의 성지로 이름나 있다. 1984년에 로마 교황청 성인품에 오른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이 태어나고, 전교하다 기해년(1839)박해로 체포되어 1841년 4월 용산의 옥중에서 교수형에 처해져 이곳 구산땅에 묻힌 곳이다. 그 외에 8분의 순교자가 남한산성에서 처형되어 이곳 구산성지에 묻혀 있다.


‣ 망월포(望月浦, 멍덜개)
광주수리조합이 설치되기 전에는 한강물이 이곳으로 범람하면 포구를 이루었는데 그 포구 이름이 멍덜개 였던 것이다. 진등을 거쳐 이 부락의 앞으로 샛강이 흐르던 곳으로 이곳 강포구에서 달을 바라보았다고 해서 망월포라 하게 되었는데, 이 말을 (멍(望) + 덜(月) + 개(浦) )라 부르게 되었으니 망월2동은 윗멍덜개, 망월 4동은 아랫멍덜개라 부르게 되었다.


‣ 장수동(長壽洞)
이 마을은 미사촌이 을축년 장마로 잠겨 이주한 이주민들로 구성 되었는데 다분히 주민들의 소망이 얽힌 지명인 것 같다. 한강가의 마을로서 옛적에는 마을 양편으로 물이 길게 흐른다고 해서 "장수구렁이"라고 부르던 것을 시간이 지나면서 경주최씨 집성촌이 형성되면서 장수를 비는 마음에서 장수동이라 쓰게 되었다고도 한다
미사동(渼沙洞)

한강 가운데 위치한 커다란 섬으로 된 이 마을은 오랜 세월동안 한강의 퇴적물이 쌓여 섬이 형성되었으며 특히 사면이 아름답고 고운 모래밭으로 둘러 싸여 있었다. 그 모래가 물결이 치는 것 같이 아름답다하여 미사리라 부른 것이다.

 
‣ 선사시대 유적지(사적269호)
이곳은 선사유적이 발굴된 곳으로 유명하다. 6천여 년 전의 선사유적이 대량으로 발굴되었고 농사짓던 밭이랑과 씨앗, 많은 종류의 석기와 빗살무늬토기, 청동거울, 유리구슬 만드는 거푸집 등이 나왔으며 원시인들이 살던 움막터가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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